장마와 무더위로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여름, 시원하게 잘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여러분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저 역시도 여러분들처럼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예열하는 중입니다.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학기 중보다는 방학 때가 글쓰기에 집중하기 좋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글을 시작하는 마음은 걱정도 되지만 즐거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크네요. 올해 여름도 무덥지만 글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이열치열했으면 좋겠습니다.
밀린 책들도 들여다보면서 문학 잡지도 훑어보고 있는데, 문학 잡지를 펼치면 습관처럼 문학상 심사평부터 찾아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글을 써서 응모했고, 또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지 감정 이입도 하게 되네요. 무엇보다 심사평을 보면서 어떤 소설을 좋은 소설의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 참고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제7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의 손보미 작가님 심사평을 인용해 보고 싶습니다.
흔한 말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창조라고 쓰니까 너무 과장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다른 단어로 바꾸어야 할까? 만든다, 정도로? 그래도 될 것 같다. '세계'라는 단어도 좀 호들갑스러운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다른 단어로는 대체가 안 될 것 같다. 그건 정말 하나의 세계다. 소설 속 시공간과 인물, 그 인물들의 선택은 동시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때때로, 쓰는 사람들은 유혹(혹은 착각)에 빠진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그러한 생각은 소설의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빈약하게 만드는 것 같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내 관점을 거칠게 드러내자면, 우리가 소설로 그리는 세계는 그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쓰는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세계 자체가 의미이다. 분리되거나 분석되거나 해석될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세계 그 자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을 쓸 때 그 세계 자체에 빠져들 필요가 있다. 의미나 개념이 아니라, 그 세계 자체에. 그것을, 어쩌면 쓰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 혹은 가져야 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자유로움과 용기를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번번이 실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도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소설에는 그런 걸 원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인물들의 대사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들의 선택에 감탄하고, 손을 꽉 쥐게 만드는 것.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게 만드는 것. 물론 이건 나만의 기준이다. 내가 품고 있는 좋은 소설의 모습이다. 다른 심사 위원들은 나와는 또 다른 각각의 기준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소설을 쓰고 있을 여러분들, 그러니까 이 공모전의 응모자들, 다른 공모전의 응모자들, 그리고 나의 내일은 좀 더 쉬워지기를 바란다. 생뚱맞지만 이게 이 심사평의 내 마지막 문장이다. (<자음과모음> 2024 여름호, 123~124쪽)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고, 쓰는 세계 자체가 의미라는 것. 그러니 그 세계 자체에 빠져들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나 용기를 가지라는 것.
소설 쓰기에 대한 저의 평소 생각과 비슷한 점이 많아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소설 쓰기뿐만 아니라 삶에서 재미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때의 재미를 오락과, 의미를 메시지와 반드시 일치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재미와 의미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기에 각자의 재미있는 세계, 의미 있는 세계를 소설로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클래스를 신청하신 분들도 이 글을 보신다면 지금 어떤 마음으로 글을 준비하고 있는지, 어떤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로 간단히 생각을 남겨 주셔도 좋을 듯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예열, 준비되셨지요?:)
#권혜린 드림
장마와 무더위로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여름, 시원하게 잘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여러분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저 역시도 여러분들처럼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예열하는 중입니다.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학기 중보다는 방학 때가 글쓰기에 집중하기 좋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글을 시작하는 마음은 걱정도 되지만 즐거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크네요. 올해 여름도 무덥지만 글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이열치열했으면 좋겠습니다.
밀린 책들도 들여다보면서 문학 잡지도 훑어보고 있는데, 문학 잡지를 펼치면 습관처럼 문학상 심사평부터 찾아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글을 써서 응모했고, 또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지 감정 이입도 하게 되네요. 무엇보다 심사평을 보면서 어떤 소설을 좋은 소설의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 참고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제7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의 손보미 작가님 심사평을 인용해 보고 싶습니다.
흔한 말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창조라고 쓰니까 너무 과장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다른 단어로 바꾸어야 할까? 만든다, 정도로? 그래도 될 것 같다. '세계'라는 단어도 좀 호들갑스러운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다른 단어로는 대체가 안 될 것 같다. 그건 정말 하나의 세계다. 소설 속 시공간과 인물, 그 인물들의 선택은 동시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때때로, 쓰는 사람들은 유혹(혹은 착각)에 빠진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그러한 생각은 소설의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빈약하게 만드는 것 같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내 관점을 거칠게 드러내자면, 우리가 소설로 그리는 세계는 그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쓰는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세계 자체가 의미이다. 분리되거나 분석되거나 해석될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세계 그 자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을 쓸 때 그 세계 자체에 빠져들 필요가 있다. 의미나 개념이 아니라, 그 세계 자체에. 그것을, 어쩌면 쓰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 혹은 가져야 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자유로움과 용기를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번번이 실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도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소설에는 그런 걸 원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인물들의 대사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들의 선택에 감탄하고, 손을 꽉 쥐게 만드는 것.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게 만드는 것. 물론 이건 나만의 기준이다. 내가 품고 있는 좋은 소설의 모습이다. 다른 심사 위원들은 나와는 또 다른 각각의 기준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소설을 쓰고 있을 여러분들, 그러니까 이 공모전의 응모자들, 다른 공모전의 응모자들, 그리고 나의 내일은 좀 더 쉬워지기를 바란다. 생뚱맞지만 이게 이 심사평의 내 마지막 문장이다. (<자음과모음> 2024 여름호, 123~124쪽)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고, 쓰는 세계 자체가 의미라는 것. 그러니 그 세계 자체에 빠져들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나 용기를 가지라는 것.
소설 쓰기에 대한 저의 평소 생각과 비슷한 점이 많아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소설 쓰기뿐만 아니라 삶에서 재미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때의 재미를 오락과, 의미를 메시지와 반드시 일치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재미와 의미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기에 각자의 재미있는 세계, 의미 있는 세계를 소설로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클래스를 신청하신 분들도 이 글을 보신다면 지금 어떤 마음으로 글을 준비하고 있는지, 어떤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로 간단히 생각을 남겨 주셔도 좋을 듯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예열, 준비되셨지요?:)
#권혜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