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8. 07. 블로그에 게재했던 글)
새벽에는 시를 탈고했고 아침에는 장문의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받았다. 내 글을 오래 읽어 주신 분이었다.
시를 쓰는 이들 특유의 수사로 예쁘게 빚어 건네준 마음들. 전부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내 시가 좋다는 말과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분명히 읽었다. 얼굴과 나이와 성격을 모르는 사이에서 글은 표정이나 악수 같은 게 된다.
시를 쓰는 나와 가르치는 나는 별개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요일이 다가올수록 깨닫는다. 가르치려면 배워야 하고 배우는 나와 쓰는 나는 같은 사람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꽤나 많이 읽었기 때문에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텍스트를 소화하는 일은 텍스트를 삼키는 일과 다른 것이다. 개론 책과 강의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이제야 교수님이 설명한 개념들을 다시 이해했다. 그것을 최대한 꼭꼭 씹어서 이따 일곱 시 반에 나의 애틋한 수강생들에게 건네줄 것이다.
진과 현은 사랑스럽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회인인데도 그렇다. 진은 아무에게도 시를 보여준 적이 없고, 현은 관뒀던 시를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과 처음 만날 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를 두 달 동안 상상했었다. 그때 내 마음은 얼마간 죽어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뭐라고 나를 수식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공자입니다, 시인이랍니다, 그래서요. 다시 말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작 학부를 졸업한 전공자입니다, 읽히지 못하는 시인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저에게는 독자가 있답니다.
저에게는 독자가 있답니다. 저에게는 독자가 있어요. 얼마나 뿌듯하고 황송한 자랑인지. 나를 읽기로 기꺼이 결심해 주는 사람, 내 문장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나에게도 있어요. 읽지는 않았지만 네 시집을 샀어. 네 시를 읽었는데 너무 어렵더라. 어쩌면 그렇게 쓰니. 너는 크게 될 거야. 막 창비 문지 이런 데서도 책을 내게 될 거야. 그런 말들에는 부끄럽게 웃게 되고 두 손을 모아 감사하게 되는데.
- 슬픈 건 이런 거구나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어요
- 생각만으로도 밀려오는 슬픔이 울음까지 도달해서
- 울음은 해결해야 하는 사건처럼 남아 있어요
이런 말들은 나를 멍하게 만든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종종 믿기지 않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처럼 느껴지고. 작가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소름돋을 정도로 죄스럽다가도, 그럼 내가, 독자도 있는 내가, 작가가 아니면 안 될 것은 뭐냐고 뻔뻔하게 배를 내밀고 싶어지고.
그래서 오늘 진과 현을 만나면 이야기할 것이다. 새 시를 탈고했노라고. 읽어 주시겠느냐고. 우리 다음 주부터는 서로의 시를 읽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할 텐데, 그 전에 공평하게 제 것을 읽고 마음대로 평해 주시겠느냐고. 나의 표정, 내가 건네는 악수, 그런 걸 읽고 받아 주시겠느냐고. 저번 시간에 시가 무언지 나도 모른다고, 그걸 안다는 자를 만나면 믿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내 말을 믿을 것이다. 시 빚는 법을 가르치는 나는 그들과 나를 동시에 책임져야 한다. 두렵지는 않다. 나에게는 독자가 있으므로. 그러나 괴로움은 여전하고 죄책감 역시 그러해서,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작아지게, 더 작아지게만 만들어서
아무리 슬퍼도 울음은 해결해야 하는 사건처럼 남아 있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2024. 08. 07. 블로그에 게재했던 글)
새벽에는 시를 탈고했고 아침에는 장문의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받았다. 내 글을 오래 읽어 주신 분이었다.
시를 쓰는 이들 특유의 수사로 예쁘게 빚어 건네준 마음들. 전부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내 시가 좋다는 말과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분명히 읽었다. 얼굴과 나이와 성격을 모르는 사이에서 글은 표정이나 악수 같은 게 된다.
시를 쓰는 나와 가르치는 나는 별개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요일이 다가올수록 깨닫는다. 가르치려면 배워야 하고 배우는 나와 쓰는 나는 같은 사람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꽤나 많이 읽었기 때문에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텍스트를 소화하는 일은 텍스트를 삼키는 일과 다른 것이다. 개론 책과 강의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이제야 교수님이 설명한 개념들을 다시 이해했다. 그것을 최대한 꼭꼭 씹어서 이따 일곱 시 반에 나의 애틋한 수강생들에게 건네줄 것이다.
진과 현은 사랑스럽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회인인데도 그렇다. 진은 아무에게도 시를 보여준 적이 없고, 현은 관뒀던 시를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과 처음 만날 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를 두 달 동안 상상했었다. 그때 내 마음은 얼마간 죽어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뭐라고 나를 수식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공자입니다, 시인이랍니다, 그래서요. 다시 말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작 학부를 졸업한 전공자입니다, 읽히지 못하는 시인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저에게는 독자가 있답니다.
저에게는 독자가 있답니다. 저에게는 독자가 있어요. 얼마나 뿌듯하고 황송한 자랑인지. 나를 읽기로 기꺼이 결심해 주는 사람, 내 문장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나에게도 있어요. 읽지는 않았지만 네 시집을 샀어. 네 시를 읽었는데 너무 어렵더라. 어쩌면 그렇게 쓰니. 너는 크게 될 거야. 막 창비 문지 이런 데서도 책을 내게 될 거야. 그런 말들에는 부끄럽게 웃게 되고 두 손을 모아 감사하게 되는데.
- 슬픈 건 이런 거구나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어요
- 생각만으로도 밀려오는 슬픔이 울음까지 도달해서
- 울음은 해결해야 하는 사건처럼 남아 있어요
이런 말들은 나를 멍하게 만든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종종 믿기지 않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처럼 느껴지고. 작가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소름돋을 정도로 죄스럽다가도, 그럼 내가, 독자도 있는 내가, 작가가 아니면 안 될 것은 뭐냐고 뻔뻔하게 배를 내밀고 싶어지고.
그래서 오늘 진과 현을 만나면 이야기할 것이다. 새 시를 탈고했노라고. 읽어 주시겠느냐고. 우리 다음 주부터는 서로의 시를 읽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할 텐데, 그 전에 공평하게 제 것을 읽고 마음대로 평해 주시겠느냐고. 나의 표정, 내가 건네는 악수, 그런 걸 읽고 받아 주시겠느냐고. 저번 시간에 시가 무언지 나도 모른다고, 그걸 안다는 자를 만나면 믿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내 말을 믿을 것이다. 시 빚는 법을 가르치는 나는 그들과 나를 동시에 책임져야 한다. 두렵지는 않다. 나에게는 독자가 있으므로. 그러나 괴로움은 여전하고 죄책감 역시 그러해서,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작아지게, 더 작아지게만 만들어서
아무리 슬퍼도 울음은 해결해야 하는 사건처럼 남아 있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